지명

충정로동


동명은 1946년 조선말의 순국열사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을 따서 지은 것이다. 충정공은 군부대신, 6개국 특명 전권대사 등을 역임하면서 신식문명을 접하게 된 지식인으로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자 이 조약 폐기를 두차례나 상소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국민과 각국 외교관에게 알리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결하였던 인물이다.

미근동


경찰청 북쪽의 미근동 31번지 부근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은 항상 물이 넘쳐 흘렀으며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아 우물에 꼬리가 있는 것 같다하여 ‘초리우물’ 또는 ‘미정’(尾井)이라 하였다. 그리고 ‘尾’ 가 ‘渼’로 바뀌고 또한 이 일대가 미나리밭이었기 때문에 불리워진 근동(芹洞)의 이름을 따서 미근동이라 하였다.

합동


마포강으로부터 온 어물이 서소문 밖 시장에 집결되어 소비되었던 곳이다. 각종 건어와 조개가 항상 끊이지 않고 공급되었기 때문에 이곳 일대를 「조갯골」 라고 하던 것이 한자로 바뀌어 합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냉천동


금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냉천동은 무악산의 지맥으로 여기저기서 약수가 많이 나왔던 곳이다.
특히 경기대학교 북쪽지역(냉천동74번지) 부근에 맑고 찬 우물이 있었으므로 「찬 우물골」즉 냉동(冷洞)이라 부르던 것을 냉천정이라고 고쳤으며 해방과 더불어 냉천동으로 다시 개칭하였다.

옥천동


금화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을 중간으로 흘러 안산에서 내려오는 개울과 영천시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데 개천에는 왕모래와 함께 옥같이 맑은 물이 폭포가 되어 흘러내렸다 하여 조선시대에는 옥폭동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는 옥천정, 1946년 이후에는 옥천동으로 개칭 되었다.

영천동


금화산 중턱에 「영천」이라고 부르던 약수가 유명하여 그 이름을 따서 영천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천연동


지금의 천연동은 구한말까지 불리워오던 이판동 일부와 석교동 일부가 각각 합해진 동으로, 당시 예부터 내려오던 천연정이란 정자가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저동


무악재 고개밑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고개밑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불리워진 현저동은, 조선시대에는 중구사신이 머물렀던 마을이라 해서 모화현이라 부르다가 일제때 현저정으로 바뀌었으며 광복과 함께 현저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북아현동


조선시대에는 성안에는 사람이 죽으면 동쪽의 광희문과 서소문을 통해야만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특히 아이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다 하여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아현」이라 부르던 것이 동명이 되었다고 하나 정확치는 않다.

대신동


금화터널을 지나면서 「성산로」좌우 및 금화터널 남쪽에 위치한 동으로 1962년에 동명을 지을 때 대현동의 ‘대'자와 신촌동의 ’신‘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대현, 대신, 신촌, 봉원동의 4개 동을 대신동사무소에서 관할하고 있다.

대현동


대신동사무소 관할지역 중 가장 큰 지역을 형성하고 있는 대현동은 조선시대에 대현동과 미근동 지역이었는데 그 중 대현이란, 아이고개(애오개)에 비하여 높은 고개, 즉 큰고개라는 뜻으로 불리워져 생긴 이름이다.

신촌동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터를 무색할 때에 풍수지리설에 밝은 경기좌우관찰사(지금의 도지사)인 하륜의 주장과 여러 신하들의 여론에 따라 신촌동 일대를 돌아보고 갔으나, 터가 좁아 도읍지로 정하지 못하고 그때부터 새 도읍의 터라하여 「새터말」이라 한 것이 한자어로 바뀌어 신촌이라 하였으며, 신촌동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봉원동


안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여 안산과 함께 역사를 간직한 지역으로 그 명칭은 현재 봉원동 23번지에 위치한 불교 태고종의 본산인 봉원사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붙여진 것이다.

창천동


안산 서남쪽에서 흐르는 개울이 이곳 중심부를 거쳐 광흥창 앞을 지나 서강으로 흘러가는 창내, 즉 창천의 명칭을 붙인 것이다.

연희동


연희궁의 위치는 연세대학교 자리가 되지만 일설에서는 우정스포츠센터 뒤쪽 연희입체교차로 부근이라 전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자동, 염동, 궁동, 음월리라 부르던 지역으로 일제 때 경기도에 속하다가 다시 경성부에 속하여 연희정이 되었으며 1946년 연희동으로 개명되었다.

홍제동


홍제동 131번지에 현재의 국립여관격인 홍제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홍제원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홍제내리라고 하다가 광복후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현재 의주로변 은평수도사업소 입구에 홍제원이 있었던 곳임을 나타내는 표지만이 남아있다.

홍은동

이름은 1950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예전의 경기도 은평면 홍제외리 지역이라는데서 홍제외리의 ‘홍’자와 은평면의 ‘은’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북가좌동


맑은 물에서만 사는 가재가 많이 잡히는 지역, 가재의 앞발과 같이 2개의 조그마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불리워졌다는 ‘가재울’의 음이 변하여 가좌동이 되었다.

충정로동


동명은 1946년 조선말의 순국열사 충정공 민영환의 시호인 ‘충정’을 따서 지은 것이다. 충정공은 군부대신, 6개국 특명 전권대사 등을 역임하면서 신식문명을 접하게 된 지식인으로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으나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기게 되자 이 조약 폐기를 두차례나 상소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30일 새벽, 국민과 각국 외교관에게 알리는 유서를 남기고 단도로 자결하였던 인물이다.

미근동


경찰청 북쪽의 미근동 31번지 부근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은 항상 물이 넘쳐 흘렀으며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아 우물에 꼬리가 있는 것 같다하여 ‘초리우물’ 또는 ‘미정’(尾井)이라 하였다. 그리고 ‘尾’ 가 ‘渼’로 바뀌고 또한 이 일대가 미나리밭이었기 때문에 불리워진 근동(芹洞)의 이름을 따서 미근동이라 하였다.

합동


마포강으로부터 온 어물이 서소문 밖 시장에 집결되어 소비되었던 곳이다. 각종 건어와 조개가 항상 끊이지 않고 공급되었기 때문에 이곳 일대를 「조갯골」 라고 하던 것이 한자로 바뀌어 합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냉천동


금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냉천동은 무악산의 지맥으로 여기저기서 약수가 많이 나왔던 곳이다. 특히 경기대학교 북쪽지역(냉천동74번지) 부근에 맑고 찬 우물이 있었으므로 「찬 우물골」즉 냉동(冷洞)이라 부르던 것을 냉천정이라고 고쳤으며 해방과 더불어 냉천동으로 다시 개칭하였다.

옥천동


금화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을 중간으로 흘러 안산에서 내려오는 개울과 영천시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데 개천에는 왕모래와 함께 옥같이 맑은 물이 폭포가 되어 흘러내렸다 하여 조선시대에는 옥폭동이라 부르다가 일제시대에는 옥천정, 1946년 이후에는 옥천동으로 개칭 되었다.

영천동


금화산 중턱에 「영천」이라고 부르던 약수가 유명하여 그 이름을 따서 영천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천연동


지금의 천연동은 구한말까지 불리워오던 이판동 일부와 석교동 일부가 각각 합해진 동으로, 당시 예부터 내려오던 천연정이란 정자가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저동


무악재 고개밑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고개밑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불리워진 현저동은, 조선시대에는 중구사신이 머물렀던 마을이라 해서 모화현이라 부르다가 일제때 현저정으로 바뀌었으며 광복과 함께 현저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북아현동


조선시대에는 성안에는 사람이 죽으면 동쪽의 광희문과 서소문을 통해야만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특히 아이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다 하여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아현」이라 부르던 것이 동명이 되었다고 하나 정확치는 않다.

대신동


금화터널을 지나면서 「성산로」좌우 및 금화터널 남쪽에 위치한 동으로 1962년에 동명을 지을 때 대현동의 ‘대'자와 신촌동의 ’신‘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대현, 대신, 신촌, 봉원동의 4개 동을 대신동사무소에서 관할하고 있다.

대현동


대신동사무소 관할지역 중 가장 큰 지역을 형성하고 있는 대현동은 조선시대에 대현동과 미근동 지역이었는데 그 중 대현이란, 아이고개(애오개)에 비하여 높은 고개, 즉 큰고개라는 뜻으로 불리워져 생긴 이름이다.

신촌동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도읍터를 무색할 때에 풍수지리설에 밝은 경기좌우관찰사(지금의 도지사)인 하륜의 주장과 여러 신하들의 여론에 따라 신촌동 일대를 돌아보고 갔으나, 터가 좁아 도읍지로 정하지 못하고 그때부터 새 도읍의 터라하여 「새터말」이라 한 것이 한자어로 바뀌어 신촌이라 하였으며, 신촌동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봉원동


안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여 안산과 함께 역사를 간직한 지역으로 그 명칭은 현재 봉원동 23번지에 위치한 불교 태고종의 본산인 봉원사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붙여진 것이다.

창천동


안산 서남쪽에서 흐르는 개울이 이곳 중심부를 거쳐 광흥창 앞을 지나 서강으로 흘러가는 창내, 즉 창천의 명칭을 붙인 것이다.

연희동


연희궁의 위치는 연세대학교 자리가 되지만 일설에서는 우정스포츠센터 뒤쪽 연희입체교차로 부근이라 전하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자동, 염동, 궁동, 음월리라 부르던 지역으로 일제 때 경기도에 속하다가 다시 경성부에 속하여 연희정이 되었으며 1946년 연희동으로 개명되었다.

홍제동


홍제동 131번지에 현재의 국립여관격인 홍제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홍제원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홍제내리라고 하다가 광복후 홍제동으로 바뀌었다. 현재 의주로변 은평수도사업소 입구에 홍제원이 있었던 곳임을 나타내는 표지만이 남아있다.

홍은동


이름은 1950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예전의 경기도 은평면 홍제외리 지역이라는데서 홍제외리의 ‘홍’자와 은평면의 ‘은’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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