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조선백자철화포도문호(朝鮮白磁鐵畵葡圖文壺)

구분 : 국보

지정번호 : 국보 107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이화여대박물관)
소유자 : 이화여대 


18세기 전반의 백자항아리로 높이53.3cm, 입지름19.4cm, 밑지름18.6cm, 배지름 43.3cm이다. 입부분은 알맞은 높이로 곧게 올라서며 목아래로 완만하게 내려가다가 어깨부분에서 둥글게 팽창되어 있다. 몸체아래로 내려가면서 홀쭉해져 전체적으로 대담하고 당당함을 느끼게 한다. 빙렬이 거의 없이 담청(淡靑)을 띤 백색으로 형태가 무늬와 함께 품격을 높이고 있다. 몸체 윗부분의 앞과 뒤에는 철사안료를 써서 포도넝쿨을 그렸는데 포도송이가 매달려 있는 것이 매우 세심하고 기품이 있어 한폭의 정제된 포도화(葡淘畵)를 보는 듯 하다. 특히 포도그림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사실성과 철사안료를 사용하여 농담과 강약을 적절히 구사한 고도의 회화적 표현이 매우 돋보이는 조선백자 항아리 가운데 빼어난 작품이다.

지정일 : 1962.12.20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청자순화 4년명호(靑磁淳化四年銘壺)

구분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237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이화여대박물관)
소유자 : 이화여대


고려시대의 청자항아리로 높이35.2cm, 입지름20cm, 밑지름6.8cm이다. 항아리의 굽밑에『순화사년 계사태묘제일실향기장최길회조<淳化四年 癸巳太廟第一室享器匠崔吉會造>』라는 음각명문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것이 고려 태조를 위한 태묘(太廟:사당)의 제1실 향기(享器:제사지낼때 쓰는 그릇)였으며, 도공 최길회의 작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항아리의 유색은 담록조의 황갈색계이며, 전면에 세밀한 갈라짐이 있고 태토(胎土: 질그릇의 밑감으로 쓰는 흙)는 회백색의 자질에 가깝다. 이항아리는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청자기술이 아직 정착되지 못했던 고려초기 청자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확실한 유물이다.

지정일 : 1963. 1.21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석조부도(石造浮屠)

구분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351호
소재지: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이화여대박물관)
소유자: 이화여대


이 부도의 원래 소재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경기도 양평군 보리사터로 추정된다. 1913년에 원위치에서 옮겨져 개인이 소유하고 있다가 이화여자대학교로 옮겨진 것이다. 경복궁 내의 보물 361호 보리사 대경대사(大鏡大師) 현기탑비(玄機塔碑)와 같이 대경대사의 부도로 추정된다. 대경대사는 나말여초(羅末麗初)의 고승으로 고려 태조 12년(929)에 입적(入寂)하였다. 그후 탑과 비석은 태조 22년(939)에 조성되었는데 부도도 그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부도는 높이 2.7㎝의 화강암으로 된 8각원당형으로 만든 지대석 위에 각면에 사자가 새겨진 하대석이 놓여있다.

지정일 : 1963.01.21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감지은니묘법연화경제7(紺紙銀泥妙法蓮華經濟七)

구분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352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11-1(이화여대박물관)
소유자 : 이화여대


고려사본(高麗사본)의 영본 1책(零本 1책)이다. 표지와 내용이 완전하며 접본식사경(摺本式 寫經)의 형태를 모두 갖추었고 글씨도 당시의 사경의 서풍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지정일 : 1963.01.02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청자투각돈(靑磁透刻墩)

구분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416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이화여대박물관)
소유자 : 이화여대


8.15이후 경기도 개성시 고려동에서 출토된 일괄 유물로서 장식의장으로 나누면 두가지 종류가 있다. A형은 몸체에 큰 쌍조호형(雙條弧形)을 세로로 어긋나게 맞춰 엮어놓은 형상으로 된 투각문을 주문으로 삼았으며 이 주문대(主文帶)의 상단에는 당초문대(唐草文帶)를 움푹 들어가게 하고 하단에는 국화문대(菊花文帶)를 앞면에서 뒷면까지 완전히 파서 모양을 냈다. 굽다리에는 거칠고 단단한 복판연화문(複瓣蓮華文)을 음각하고 천부 (川部)에는 연화문(蓮花文)을 음각했다. B형은 몸체에 큰 타원형의 쌍조환형(雙條環形)을 세로로 어긋나게 맞춰 엮어 놓은 형상을 음각했다. 이 주문대의 상단에는 당초문을 음각하고 하단에는 4면에 안상 하나씩을 투각 했으며, 굽다리에는 A형과 같은 종류의 연판문(蓮瓣文), 천부 또한 A형과 같은 연화문 음각이 장식되었다. 유약은 회청색이며 전면에 고르지 못하게 씌워져서 빛깔의 짙고 옅음이 눈에 띄며, 굽 가장자리 부분중 유약이 벗겨진 철색을 드러내고 있다.

지정일 : 1965.01.01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죽주봉업사 정우5년명반자(竹州奉業寺 貞祐五年銘飯子)

구분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576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연세대학교박물관)
소유자 : 연세대학교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봉업사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청동제 대형반자이다. 반자를 금고 즉 쇠북이라고도 한다. 사찰에서 공양시간을 알릴 때 반자를 쳤다고 한다. 반자는 양면이 아니라 한 면만 있다. 연세대학교 소장 봉업사지 반자는 표면지름이62.5cm, 측면 너비는 12.9cm로 고려시대의 다른 반자들의 표면지름이 40cm 정도인 점과 비교하면 큰 편이다. 반자의 표면에는 큰 두 개의 동심원이 있고, 이 원들의 안팎에 문양을 장식하였다. 중심에는 9개의 씨방(또는 화심)이 있는 3중의 8엽 꽃이 있으며, 작은 동심원 바깥에는 연판문(蓮瓣紋)이 장식되었다. 큰 동심원 바깥면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하였다. 문양들은 동심원을 이루는 굵은 선들을 제외하면 모두 얕고 가느다란 편이다. 반자의 측면에는 대개 음각으로 제작년대, 사찰의 이름, 축원문 등을 기록한다. 봉업사지 반자에는 1행47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고려 고종4년(1217년)에 제작되어 봉업사에 속하였던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지정일 : 1973.12.31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기사계첩(耆社契帖)

구분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638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11-1(이화여대박물관)
소유자 : 이화여대


이 기사계첩(耆社契帖)은 현재 전해 오는 계회첩 가운데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것으로서 주목되는 자료이다. 숙종(肅宗) 45년(1719)에 있었던 계회(契會)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참석했던 나이 많은 신하들의 제안으로 1719년 4월 17, 18일 양일에 있었던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것인데, 개개의 진영제작(眞影製作)이 오래 걸려 다음해인 1720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지정일 : 1978. 12. 07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성석편(城石片)

구분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642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이화여대박물관)
소유자 : 이화여대


일명 고성석각(故城石刻) 또는 성벽석각(城壁石刻)이라 불리우는 이 성석의 파편크기는 가로36cm, 세로18cm, 두께 9cm이며, 명문은 7행 27자로 자경 약 3cm이다. 이 성석(城石)은 고구려 평양성 축성 당시에 각자 글자를 새긴 성석의 하나로, 비교적 평평한 자연석 면에 가공 없이 그 위에 그대로 글자를 새긴 것이다. 원래 오경석이 입수 보관하였던 것을 아들인 오세창이 계승 소장했으며, 현재는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인수 소장하고 있다. 성석의 현재 상태는 간지와 본문 사이의 ‘월일’부분이 없어졌기 때문에 크게 두 조각이 났으며, 전체 아홉 조각으로 균열되어 있는 것을 석고(石膏)로 고착시켜 놓았다. 내용은 ‘기유년(己酉年) 5월21일 이곳으로부터 아래쪽 동쪽을 향하여 12리(里) 구간을 물성소형 배 ■백두(物省小兄 俳 ■百頭)가 구축한다.’ 라고 풀이할 수 있다.

지정일 : 1978.12.07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백자청화송죽인물문호(白磁靑畵松竹人物問壺)

구분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644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이화여대박물관)
소유자 : 이화여대


목은 얕게 직립하고 어깨가 팽창되어 긴장감이 느껴지는 형태이다. 밑은 좁게 빠지다가 굽에서 나팔모양으로 퍼졌는데, 이는 얕게 수직으로 내려가는 굽을 단 초기 청화백자에서 흔이 보이는 형태이다. 바닥에는 넓은 횡선을 한 줄 그린 다음 그 밑에 구름을 그렸고, 굽에도 횡선 한줄을 그렸다. 몸에는 전체에 걸쳐 마주보는 위치에 소나무 한 그루와 대나무 몇그루를 그렸고, 소나무 밑에는 책상에 팔을 괴고 앉은 인물을, 대나무 밑에는 웃어른을 모시고 서 있는 동자의 인물 입상을 각각 그렸다. 백자유약은 청백색으로 고루 녹았고, 청화의 색은 연하고 아름다우며, 필치는 회화적이어서 화원의 그림임이 분명하다. 바닥에 균열이 있고 입 가장자리에 약간의 보수 흔적이 있으나 보기 드문 초기의 걸작이다.

지정일 : 1978.12.07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백자철화운룡문호(白磁鐵畵雲龍文壺)

구분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645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이화여대박물관)
소유자 : 이화여대


입은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얕게 직립하였고, 몸통은 어깨가 팽창되고 밑으로 급히 좁아져서 당당한 느낌을 준다. 입 아래위에서 선을 돌리고 그 사이에 당초문(唐草文:덩굴무늬)을, 그리고 어깨에는 장식적인 연판문대를 돌렸다. 몸체는 전면에 걸쳐 용 한 마리와 구름무늬로 채워쳤고, 굽 위에는 상하의 구획선을 친 사이에 삼각형 무늬가 있는데, 뇌문(雷文:사각형의 소용돌이 모양으로 된 무늬)의 변형으로 보인다. 그 위에는 거치문(据齒文:톱니모양)같은 무늬가 있는데, 이것도 앙련문(仰蓮文: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무늬)이 약식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유약은 유백색으로 투명도는 낮으나 문양의 필치가 활달하고 철사안료의 발색도 또렷하여 문양과 기형이 조화로운 수작이다.
지정일 : 1978.12.07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월인석보(月印釋譜)

구분 : 보물

지정번호 : 보물 745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134(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유자 : 연세대학교


1459년(세조 5)에 세조가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지은『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설명부분으로 하여 합쳐 펴낸 책이다. 초간본 10권(1, 2 , 7, 8, 9, 10, 13, 14, 17, 18권) 8책과 중간본 2권(21,22권) 3책이 보물 제 745호로 지정되었으며 2권(11, 12권)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제정되었다. 월인석보(月印釋譜)는 한글 창제 직후에 간행된 산문 자료로서 국어국문학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세종과 세조, 2대에 걸쳐 임금이 짓고 편찬한 것이다.

지정일 : 1983.05.07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무악봉수대(毋岳烽燧臺)

구분 : 기념물 

지정번호 : 서울시기념물 13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소유자 : 국공유(산림청)


변란등을 횃불로 알려 위급함을 전하는 봉화터가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5군데 있었는데 그중에서 2군데가 안산 (무악산) 정상에 있었다. 하나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발 직봉78 간봉22처를 거쳐 안산 "동봉수"(제3봉수로)에서 전해져 남산으로 최종보고 되었고, 다른 하나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발 서해안을 따라 직봉 71간봉 35처를 거쳐 안산"서봉수"(제4봉수로)에 전해져 남산으로 전달되었다. 현재 2개의 봉수대 중 동봉수대는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일환으로 남산중앙 봉수대와 연계하여 제3봉수로의 봉화를 올리기 위해 봉수대가 멸실된지 100년만인 1994. 8.30 서대문 향토사 연구회의 자문을 받아 복원하였다. 이봉수대의 면적을 381㎡, 상부연대 108㎡, 하부연대 307㎡, 봉화연조대의 높이 3.2m로 자연것을 사용·축조하였다. 서봉수대는 동봉수대로 부터 100m 떨어진 현 군부대의 통신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정일 : 1993. 09. 20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

구분 : 유형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91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50-3
소유자 : 명지대


임진왜란 당시 출전한 명나라 장군 양호의 무훈(武勳)을 찬양하기 위하여 선조 31년(1598), 광해군 2년(1610), 영조 40년(1764), 헌종 1년(1835)등 4차례에 걸쳐 건립되었다. 그중 헌종 1년에 세워진 비는 대신고등하교 교정에서 발견되었으며 명지대학교 후정에 있는 이 비는 선조~영조 기간에 건립된 3기중 1기로 추정되며 정확한 연대 및 나머지 2기의 행방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의해 연구중에 있다.

지정일 : 1993. 04. 03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화산군신도비(花山君神道碑)

구분 : 유형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41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73-3
소유자 : 시유


이 비는 조선 영조 때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도총관(都總管)이었던 화산군의 행적과 세계(世系)를 기록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낙창군(洛昌君)이 영조 23년(1747)에 건립한 높이 약6m의 화강석비로 속칭 거북비로 통한다.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등으로 구분하여 만들어졌으며, 조각수법은 조선중기 이후의 수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비문(碑文)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송인명(宋寅明)이 지었고, 글씨는 화산군의 조카 서평군(西平君)이 썼으며, 비석의 위쪽에 쓴 글자는 화산군의 아들 낙창군이 직접 썼다.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보도각백불(普度閣白佛)

구분 : 유형

지정번호 : 서울시 유형문화재 17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8
소유자 : 옥천암


이 석불(石佛)은 높이 10m이상의 거암(巨巖)에 새긴 관음보살좌상(觀音普薩坐像)이다. 불암(佛岩)으로 일컫는 이 불상의 조성연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서울로 도읍을 정할 때도 이 석불에 기원을 했으며, 고종(高宗)의 어머니 흥선대원군 부인(夫人)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閔氏)도 아드님의 복을 빌었다고 한다.

지정일 : 1973. 06. 07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왕비녹원삼(王妃錄園杉)

구분 : 중요민속자료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63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이화여자대학교)
소유자 : 이화여대


원삼의 겉은 두록색(豆錄色) 비단이고 안은 대홍색(大紅色) 비단에다 남색비단으로 선이 둘러져 있다. 위에는 수·복자(壽·福子)를 엇갈려 가며 일정한 간격으로 금박(金箔)을 하고 있다. 여기에 잠안옥 원삼단추가 달려있다. 흉배는 금실로 수놓은 봉황흉배(鳳凰胸背)이기 때문에 왕비의 것이라고 하겠다.

지정일: 1979.01.03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고종사제복(高宗紗祭服)

구분 : 중요민속자료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62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이화여자대학교)
소유자 : 이화여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옷은 조선중기 문인들이 편하게 입던 옷으로 학창의라 하며, 고종이 입었던 것이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학창의는 관복 아래 받쳐 입는 옷으로 보통의 학창의가 바탕색이 백색인데 비해 이 학창의는 남색이라는 면에서 연구의 여지가 있다.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조선말의 학창의 제도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로 쓰이는 이 옷은 소매가 넓어 대창의에 해당되고, 옷고름이 99.3m이다.

지정일 : 1979. 01. 03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고종주학창의(高宗朱학창의)

구분 : 중요민속자료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61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이화여자대학교)
소유자 : 이화여대


이 옷의 바탕은 홍색(色) 갑사(甲紗)로 지었고 깃, 도련, 소맷부리에는 흑색(黑色) 갑사(甲紗)로 선(線)을 둘렀는데, 길과 선(線) 사이에는 0.3m의 백선(白線)을 두르고 있다. 고종말(高宗末)의 의제개혁(衣制改革) 당시 관원이 임금에게 하례하던 때에 입던 예복일 가능성이 크다. 이 옷은 창덕궁(昌德宮)에 있는 20여점의 유의(遺依)에 비하여 그 제작과 보존상태가 매우 우수하다.

지정일 : 1979. 01. 03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영산재(靈山齋)

구분 :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번호 : 제50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소유자 : 박희덕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 하시는 도량을 시공을 초월하여 본 도량으로 오롯이 옮기고 영산회상의 제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다함께 진리를 깨달아 이고득락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의의가 있다.

지정일 : 1973.11.05 :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봉산탈춤

구분 : 중요무형문화제
지정번호 : 제17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2동 156-293
소유자 : 윤옥


봉산탈춤은 해서 즉 황해도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온 해서탈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탈춤이다. 봉산탈춤은 약 200년전에 이고장의 이속들에 의해 놀아왔으며 여기에 나오는 재담은 어느 탈놀이보다 한시의 인용과 풍자적인 시문이 많은 것으로 보아 세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놀이는 황해도 지방의 큰 명절인 단오에 놀았으며, 장소는 원래 옛 봉산읍 경수대였던 것이 1915년 경에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기면서 그곳의 경암산 아래에서 하였다.
옛 봉산읍의 경수대는 강변의 평평한 터로 석벽 밑에 겨우 무릎이 닿을 높이의 돌축대를 쌓은 것 뿐인데 이와 같은 축대 위나 평지에서 노는 것이 황해도 탈춤의 공통된 탈판으로서 이러한 야외무대는 '경도잡지'의 이른 바 야희의 전통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탈판은 낮에는 단오놀이의 씨름과 여자들의 그네뛰기에 사용되다가 밤에는 장작불을 피워 놓고 밤새도록 탈놀이를 하였다 한다.

단청장(丹靑匠)

구분 :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번호 : 제48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봉원동 31
소유자 : 이치호


1972년 8월1일에 봉원사(봉원동 31)에 있는 이치호(법회:萬奉)스님이 중요무형문화재 제 48호로 지정되었다. 단청장은 단청일을 잘하는 장인을 말한다. 단청은 목조건물에 채색으로 무늬를 그리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공예품·조각물 등에 오색의 안료를 칠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일, 건물, 벽체에 그리는 장식화까지 포함한다. 우리나라 단청은 삼국시대 고구려 고분등에서 이미 모습을 찾을 수가 있어서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주로 목조건축물에 많이 쓰인다. 단청을 하면 목재의 보존에 유리하고, 목재부분의 거칠고 나쁜 부분을 가릴 수 있으며 건물을 장엄히 하는데 도움이 된다.

종묘제례악(宗錨裁禮樂)

구분 : 중요무형문화재
지정번호 : 제1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홍은동 48-84
소유자 : 이강덕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홍은동 48-84에 사는 이강덕옹이 1964.12.7 편경부분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조선왕조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를 모신 종묘의 제사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가리킨다. 종묘제례 의식에는 각 절차마다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이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여러 음악을 연주하는 동시에 종묘악장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와 정대업지무(錠大業之舞)라는 무용을 병행한다.조선세종 31년에 세종이 고취악(鼓吹樂)과 향악(鄕樂)을 토대로 하여 보태평, 정대업, 발상(發祥) 봉래의(鳳來儀)등 많은 음악을 새로 창제하여 보태평에 11곡, 정대업에 15곡을 지었다. 이것이 역대 임금의 공덕을 기리는 악장을 얹어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아악기와 당악기와 향악기를 두루 섞어 편성하여 연주하고 문무와 무무를 추도록 하였다. 세조 9년(1463)에 보태평과 정대업을 개편하여 세조 10년에 처음으로 종묘악장에서 보태평, 정대업이 연주 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선조때 약간 고치기는 하였지만 1946년까지 춘하추동 사계절에 행하는 제향에서 연주해왔다. 그리고 1946년에 중단되었다가, 1971년부터 해마다 5월 첫 일요일에 행하는 종묘대제에서 종묘제례악과 악장과 일무가 동시에 연행되고 있다. 종묘제례악은 장엄하고 웅대한 음악이며 500년 전에 전승되던 고취악과 향악이 제례악으로 승화되어 살아남은 소중한 음악이다.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구서울구치소

구분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324호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
소유자 : 국공유


구(舊)서울구치소는 일본강점기때의 민족독립운동역사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정치적 격변 등 우리 나라 광복 40여년의 사회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을 본격화 하기 위하여 융희원년(1907), 인왕산 기슭 이곳에 근대적 감옥을 건축하여 경성감옥이라 칭했고 1912년에는 서대문 감옥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일제때 이곳은 여느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소녀수가 모두 수감되어 있었으므로 3.1운동때 유관순열사도 갇혀 있다가 고문끝에 숨을 거두었고, 특히 1919년 3.1운동 때에는 33인의 민족대표를 위시하여 수많은 애국시민, 학생들이 투옥됨에 따라 수용시설을 초과해서 수감하기도 했다. 광복직후 1946년에는 서울교도소로 개칭되었다가 1967년 7월 서울구치소로 되었다. 4.19, 5.16등 정치적 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 되어있던 이곳은 도시발달로 인해 서울구치소 위치로는 부적합하여 1987년 11월15일에 경기도 의왕시로 옮겨갔다. 김구선생, 강우규, 유관순열사 등이 옥고를 치른 제 10,11,12,사의 감옥건물과 사형장등을 사적 324호로 지정,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민족의 자존과 자주정신을 일깨워주는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세대학교 언더우드관

구분 : 사적
지정번호 :사적 제276호 지정(1981. 09. 25)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번지
소유자 : 연세대학교


이 건물은 1921년 4월에 착공하여 1924년 3월에 준공한 연건평 2,700㎡의 석조건물로 초대교장이었던 언더우드(H.G.Hnderwood)목사의 업적과 그 인격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형 존 티 언더우드씨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출처 : 서대문구청 홈페이지  

연세대학교 스팀슨관

구분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275호 지정(1981. 09. 25)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번지
소유자 : 연세대학교


1919년 4월에 착공하여 1920년 8월에 준공한 연건평 1,150㎡의 석조2층 건물로서 연세대학교에 최초로 세워진 근대식 학교건물이다. 이 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의 언더우드(H.G.Underwood)목사가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서 항구적인 교사 건축을 위하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찰스 스팀슨의 기부금을 얻어 놓고 세상을 떠난 뒤, 후임 교장인 에비슨이 그 기부금으로 건립하였다.

영은문주초(迎恩門住超)

구분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33호 지정(1963. 01. 21)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4번지
소유자 : 국공유


독립문 앞에서 옛 영은문의 주초(柱礎)였던 두개의 돌기둥이 서 있다. 이 기둥은 태종 7년(1407)에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서대문 밖에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홍살문으로 迎紹門이었는데 중종 31년(1536)에는 金安老의 발의로 홍살문을 개축하고 청기와를 입힌 후 영조문이란 편액을 걸었다. 그후 중종 34년(1539) 명나라 사신 설정총이 迎恩門이라 쓰고 걸도록 하여 이후로 부터 영은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문은 건양원년(1896) 2월에 헐리어 독립문이 세워짐으로서 1934년에 두개의 돌기둥만 원위치에서 남쪽인 독립문 앞에 옮겼으나 1979년 다시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독립문(獨立門)

구분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32호 지정(1963. 01. 21)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945번지
소유자 : 국공유


1898년 6월 자주독립의 상징물 건립을 위하여 독립협회의 주관으로 이루어졌으며 기금을 협회의 모금한 돈으로 충당되었다. 중국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 자리에 한국인 기사 심의석에 의해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여 45*30cm 크기의 화강암 1,850개로 높이 14.28m, 넓이11.48m로 프랑스 개선문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1979년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인물

스크랜튼(M.F.Scranton)

1832~1909


감리교 여선교사. 이화학당의 창립자로서 그녀 나이 52세때 아펜젤러(H.G.Appenzeller) 내외와 1885년 6월 20일에 학교에 들어왔다.
아홉채의 초가집을 사서 헐고 그 자리에 교사(校舍)를 짓고 학생들을 모으기 시작하여 고종(高宗) 24년(1887년)에 이화학당이란 명칭으로 7명의 학생에게 교육하였으며, 광무 8년(1904년)에 이화여학교로 고치고, 1910년 4월에 대학과를 설치하여 1914년에 제1회 졸업생 3명을 배출하였다.


이동인

1849~1881


조선왕조 말기의 개화승으로 원래는 동래(東來) 범어사(梵魚寺) 출신이었으나 주로 봉원동에 있는 봉원사(奉元寺)에 기거했다고 한다. 일찍부터 개화사상에 눈을 더 명치유신(明治維新) 후의 일본의 발전상에 관심을 가지고 밀항하여 처음 일본 시찰에 나선 개화파의 선구자이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그가 기안해 둔 초고를 기준으로 하여 조약을 이룩하는 등 소장 정치가로 외교에 공헌한 바 컸다. 


언더우드(H.G.Underwood)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1885년 5월 5일 제물포에 도착, 서울에 들어와 의사 알렌의 한국정부의 도움으로 설립한 광혜원(廣惠院)의 학생들에게 물리 화학을 가르쳤다.
1915년 3월에 경신학교를 세우고 여기에 대학부를 설치하자 1917년 4월 7일 조선총독부는 대학이 아닌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내렸으니 이것이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전신이다.


민영환

1861~1905


한말의 문신으로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시정(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 일파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하여 자결하였다.
1946년 20월에 충정로 동명(洞名)을 붙일 때 시호인 충정공을 따서 정했다.


서재필

1866~1951


전라남도 보성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김옥균, 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며, 정부 예산으로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 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지금의 영천동에 있었던 모화관(慕華館)을 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사용하였으며 또한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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